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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통은 예술가에게 영감 주는 도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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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9-08 15:41 조회1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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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과리노, <성 아가타의 순교>, 1640년께,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솔로프라 성 아가타 성당 소장.
프란체스코 과리노, <성 아가타의 순교>, 1640년께,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솔로프라 성 아가타 성당 소장.

 

대학 시절, 주한미군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한 기지촌 여성들의 사진들이 한번씩 캠퍼스에 전시되곤 했다. 특히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한 윤금이씨의 사진이 기억난다. 주검으로 발견될 당시의 모습이었는데, 그 이미지도 참혹했지만 사진 설명 자체가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잔혹한 미군에 의해 말 그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피부와 몸속을 가리지 않고 샅샅이 파괴당한 윤금이씨의 몸. 윤씨는 ‘유린당한 우리 강산’이었고, 우리가 주한미군지위협정 개정 운동에 매진해야 할 이유 자체였다. 그 숭고한 이유 아래 윤씨는 피투성이 이미지로 영원히 고정돼 한낮 태양 아래 진열됐고, 불특정 다수의 눈동자가 그 몸 위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갔다. 누군가에겐 경악과 분노를 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겐 스펙터클한 볼거리였다. 나는 왠지 살인자 미군뿐 아니라 ‘동포들’ 때문에 윤씨가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씨의 시신 사진을 봤을 때 남았던 불편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한참 뒤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손택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인간들의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때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손택에 따르면 고통을 담은 이미지는 일종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는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라는 것이다. 이 ‘훔쳐보는’ 행위에 내가 동참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또 있었다. 바로 유럽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였다.

 

 

성녀의 고통 꼼꼼하게 전시한 그림

 

미술관 벽에는 예외 없이 고통받는 여성의 몸이 걸려 있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주제는 예술사에서 꾸준히 다뤄졌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여성들은 헐벗은 채 납치와 강간을 당하고 있었고, 범죄 장면을 묘사한 그림 속에서 희생양은 거의 여성의 몫이었다. 순교를 빌미로 여성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종교화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성녀 아가타는 순교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유방이 도려내진 성녀 아가타는 여성성을 공격당했다는 점에서 특히 연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녀 아가타는 로마 시대 시칠리아섬에서 귀족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앙이 유독 깊었던 아가타는 결국 독신으로 수도하기로 신께 서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행이 닥쳤다. 시칠리아의 총독 퀸티아누스가 아가타의 미모에 반해 청혼한 것이다. 아가타는 독신 서원을 이유로 청혼을 거절했고, 앙심을 품은 퀸티아누스는 기독교 탄압에 편승해 아가타에게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아가타는 배교하지 않았고 가슴을 자른다는 협박 앞에서도 “내 육체는 도려낼지라도 내 영혼을 도려낼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맞섰다. 결국 이글거리는 석탄 불 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의 성녀 아가타를 예술가들이 그냥 둘 리 없다. 그렇다면 아가타는 그림에서 어떤 식으로 재현돼 왔을까.

 

이탈리아의 화가 프란체스코 과리노(1611~1654)가 그린 <성 아가타의 순교>는 로마인들이 아가타의 몸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상의가 완전히 벗겨진 채 두 손을 나무에 결박당한 성녀 아가타. 그 곁에는 작정하고 그를 괴롭히려 모여든 7명의 남성이 있다. 그중 한명은 칼을 들어 아가타의 왼쪽 가슴을 자르고 있다. 아가타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아기 천사가 없었더라면 이 그림이 종교화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과리노는 아가타의 고통을 꼼꼼하게 전시한다. 칼날은 이미 가슴 중간까지 들어가 있고 붉은 피는 속수무책으로 드레스를 적시는 중이다. 아가타는 고통에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과리노는 학대받는 아가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야만 관람객이 종교적 감정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가의 무의식적인 사디즘 역시 그림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고 하면 너무 가혹한 판단일까.

 

성녀의 고초가 관음의 대상이 되는 판국이니, 성매매 여성의 불행한 일상은 더없이 손쉬운 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카바레, 극장, 사창가 등 파리 밤 문화의 초상을 포착한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툴루즈로트레크가 즐겨 그렸던 인물은 파리 뒷골목 밑바닥에서 살았던 성매매 여성이었다. 그림 중개인 폴 뒤랑뤼엘이 툴루즈로트레크에게 아틀리에로 안내해달라고 하자 그를 성매매 집결지로 데려갔다고 하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친구 로맹 쿨뤼스가 “툴루즈로트레크는 마치 늑대처럼 사람들의 특징을 스케치했다”고 했을 정도로, 그는 번득이는 눈으로 성매매 여성의 일상을 속속들이 뽑아내어 화폭에 옮겼다. 툴루즈로트레크의 1894년 작 <의료 검진>도 그중 하나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lt;의료 검진&gt;, 1894년, 판지에 유채, 워싱턴국립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의료 검진>, 1894년, 판지에 유채, 워싱턴국립미술관

 

성병 검사 순간까지 태연한 관찰

 

성매매 여성 두 명이 줄을 선 채 성병 의료검진을 기다린다. 물론 이 검사가 여성들의 건강을 염려해서 행해진 것은 아니다. 당시 파리는 성병이 만연했으며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이라 매독은 지금보다 훨씬 치명적인 병이었다. 성구매 남성의 매독 감염 예방 차원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하반신을 노출한 채 검사를 기다리는 그들의 표정은 애써 무감각하다. 오히려 수치심을 얼굴에 표출하는 쪽이 더 굴욕적이지 않았을까. 최대한 기계적으로 검사에 응하는 것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여성들 앞에 갑자기 분필을 든 툴루즈로트레크가 나타났다. 그의 그림은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그냥 지나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성병 숙주인지 아닌지 평가받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툴루즈로트레크의 촘촘한 눈길이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은 툴루즈로트레크가 빨리 그 자리를 떠나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오스트레일리아의 코미디언이자 희귀 유전병 ‘불완전 골형성증’을 앓은 장애인 스텔라 영은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당신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장애인의 고군분투가 비장애인들에게 동기부여용 휴먼스토리로 소비되는 현상을 ‘감동 포르노’라고 비판한 말이다. 이 일침은 예술가의 그림에도 유효하다. “나의 가난, 내 삶의 비참함, 내 몸에 새겨진 고통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그것은 피해자의 대상화이며, 대의를 가장한 관음이며, ‘고통 포르노’일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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